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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 대한 편견과 문화로서의 과학 상아탑에 대한 오해

과학에 대한 편견과 문화로서의 과학 상아탑에 대한 오해 2011년 02월 11일(금)

과학지식인 열전 영웅신화로서의 과학은 과학자들에게서 능동적인 역사 참가자로서의 역할을 빼앗아간다. 과학지식의 내용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영웅신화는 필연적이다. 그것은 과학지식이 지닌 비역사적인 특징과 일반성을 추구하는 과학의 독특한 성격으로부터 기원한다. 하지만 과학과 사회가 상호작용하는 영역에서, 그러한 영웅신화는 ‘문화로서의 과학’, ‘지식인으로서의 과학자’의 전통을 망각하게 만드는 도구가 된다.

과학에 대한 대중과 철학자의 편견

이상하(과학철학자)는 ‘과학자는 역사 참가자가 될 수 없다’는 편견을 ‘대중의 편견’과 ‘철학자의 편견’으로 구체화했다. 대중의 편견은 다음과 같다.

“대중의 편견: 오로지 실험과 관측에 의거해 과학의 객관성이 확보된다. 경험적인 학문일 수 밖에 없는 과학은 다른 학문 분야와 구별되는 동시에 분리되어 있다. 그 결과 과학자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오랜 훈련 과정 속에서 세상의 다른 일에는 무관심해진다1.”

이러한 대중의 편견은 ‘상아탑 속의 과학자’라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과학자는 특정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존재하며, 전문분야의 지식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발언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갖는다. 이러한 대중의 편견은 다음과 같이 공략할 수 있다. 즉, “과학의 대상은 경험이고, 경험이 과학의 출발일지라도, 경험만으로 과학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과학의 역사 의존성이 드러난다. 소박한 과학의 역사 의존성을 인정하게 되면 과학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발견하게 된다.

“과학자들은 고전역학에 함축된 세계를 명백히 그려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일종의 습관이다. 그 어떤 과학자도 수식을 통해 물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그려낼 수 없다. 그렇게 그려내 보는 것은 고전역학을 형성했던 세계관과 역사적 배경을 추적해야 가능하다. 이러한 추적 과정에서 과학은 다른 분야와 분리되어 다루어질 수 없다. 역사 속에서 과학과 타 분야의 상호 의존성을 의식한 과학자는 철학과 같은 인문학에 무관심할 수 없다. 과학이 오로지 경험적으로 성립하며 다른 분과와 분리되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2.”

과학에 대한 철학자들의 편견은 다음과 같다.

“철학자의 편견: 과학의 발달은 비역사적인 어떤 구조를 갖고 있다. 과학자 집단은 그 구조의 운반체이다. 과학자는 자신의 작업 속에서 발견되는 철학적 문제에 굳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관심을 갖더라도 그 관심은 과학 발달의 구조와 무관하다. 과학자는 과학 발달 자체에 대한 능동적인 역사 참가자가 될 수 없다. 과학자는 패러다임 등에 함축된 퍼즐 풀기 과정의 운반체이거나 아니면 이론통합 과정의 운반체이다3.”

이러한 철학자의 편견은 ‘지식 운반체로서의 과학자’라는 이미지로 집결된다. 즉, “과학자들은 정상과학에서 과학혁명으로 이동하는 패러다임 전환의 비역사적인 구조의 운반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4.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가장 극명하게 표출된 철학자들의 이처럼 오만한 태도는 과학자들은 물론 철학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철학자들의 편견은 과학을 둘러싼 많은 문제들이 동시에 철학적이며, 과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이러한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공략될 수 있다.

“양자역학을 둘러싼 많은 문제들은 동시에 철학적 문제들이다. 이론 물리학자들이 다루는 철학적 문제들은 양자역학을 둘러싼 실재론과 반실재론의 폭을 넘어서 훨씬 복잡하다. 과학자들 중 일부는 반드시 그들이 다루는 과학 내에 함축된 비정합성과 철학적 문제를 의식하고 있다. 어느 시대든 그 당시 이론이 안고 있는 비정합성과 철학적 문제에 관심을 가진 과학자들이 존재했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이론은 더욱 정교해진 동시에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왔다5.”

과학에 대한 과학자 스스로의 편견

어느 시대든 자신의 작업을 철학적으로 고민했던 과학자들이 존재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 속에서도 과학자들 중 일부는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고민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민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제도들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현대사회 속에 사는 과학자들은 다른 시대를 살았던 과학자들보다 더욱 민감하게 이 문제를 의식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과학자는 역사 참가자가 될 수 없다는 과학자 스스로의 편견으로 나타난다.

“과학자의 편견: 과학과 기술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하나의 복합체로 존재한다. 따라서 ‘순수과학’의 이상은 포기하고 ‘과학기술’이라는 개념 속에서 연구를 수행해야만 한다. 호기심에 의해서만 수행되는 과학 연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과학은 국가의 대규모 지원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거대과학으로 변모했고, 국가의 지원은 국민의 세금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과학 연구는 어떤 방식으로든 국민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결과를 창출해야만 한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작업의 철학적 문제들을 고민할 시간이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한 작업은 더 이상 과학적 능력을 발휘하기 힘든 노년의 은퇴한 과학자들이 취미로나 하는 것이며, 그런 작업에 흥미를 느끼는 과학자들은 과학적 능력이 형편없기 때문에 그런 분야로 후퇴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작업 이외의 것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6.”

이미 대중의 편견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역사적/현실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증명된 ‘상아탑 속의 과학자’의 이미지가 과학자들 스스로의 편견 속에 재등장한다. 이러한 과학자 스스로의 편견은 이미 앞에서 기술한 영웅신화적 과학이 도달하는 곳이다. 현대사회를 사는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암묵적으로 이러한 편견에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암묵지(暗默知)는 실험실에서 도제관계를 통해 전수되고 확산된다.

국가와 대중이 원하는 ‘이상적인 과학자’의 상이 존재한다. 그것은 ‘노벨상 수상자로서의 과학자’다. 노벨상은 과학지식이 인류에 기여했다는 보증수표다. 따라서 노벨상은 과학지식이 실제로 응용되어 실생활에 도움을 준 것으로 판단된 분야에 우선적으로 수여되는 경향으로 편향되어가고 있다. 그 속에서 과학자들의 사고도 그러한 방향으로 세뇌되어간다. 이러한 과정은 과학자들에 의해 시도된 영웅신화적 과학을 강화시킨다.

과학지식이 인류를 위해 봉사해야 하고, 과학자들이 국민들의 세금에 대해 그러한 의무를 가진다는 것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러한 작업이 과학자들 스스로의 정체성조차 확립하지 못한 채 진행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큰 문제일 수 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한 채, 단순히 인류에 봉사한다는 신념으로 과학에 종사하는 과학자는 자신의 작업의 주인이 아닌 노예로 전락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단순한 신념, 즉 과학자의 인류봉사라는 신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자가 어떤 방식으로 인류에 봉사해왔으며, 어떤 방식의 봉사가 인류를 더욱 행복하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철학적/윤리학적 고민은 과학자를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든다. 현대사회의 과학기술이 위험사회로 가는 도구가 된다는 대중과 철학자들의 신념에 대해, 과학자들은 주체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철학자들과 윤리학자들이 세워둔 틀을 따라서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가꾸어온 전통, 그 전통을 재확인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여야만 한다.

과학자들의 윤리의식이란 노벨상의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승자로 알려졌던 과학자들의 부정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7. 그것은 지극히 수동적인 윤리의식에 불과하다. 과학자들의 연구윤리는 중요하다. 하지만 과학자들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강요된 그러한 윤리로는 과학자 스스로의 정체성이 확립될 수 없다. 오히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선조가 지니고 있었던 그 '잊혀진 전통'을 다시금 되살림으로써만 그러한 윤리에 한걸음 더 다가설 수 있다.

문화로서의 과학, 지식인으로서의 과학자에 대한 소고

과학자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과학은 어떻게 사회와 상호작용해 왔는가? 과학의 주체로써 과학자들은 어떻게 그 역할을 수행해 왔는가? 이러한 탐구를 통해 수동적으로 부여된 과학자들의 윤리, 과학의 윤리가 능동적인 모습으로 탈바꿈될 수 있다. 역사 속의 과학, 지성사 속의 과학자들은, 사회로부터 윤리적 기준을 수동적으로 부여 받아야만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할 수 있는 그런 약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역사 속의 과학은 모든 분야의 학문에 영향을 미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과학지식이라는 비인간적인 체계로서만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그 주체로서의 과학자, 당당한 사회 속의 지식인으로서의 과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19세기와 20세기는 그러한 당당한 지식인으로서의 과학자들이 활약했던 세기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경제체계로서의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면서, 과학자들의 그러한 모습은 점차 희미해져 갔지만, 한번 확립된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지성사 속에서 과학자들은 당당히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단순히 그들의 직업인 과학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식인의 한 축으로서 과학자들은 투쟁해 왔다.

▲ 김우재 UCSF 박사후연구원 
이제 ‘문화로서의 과학’과 ‘도구로서의 과학’을 들춰 볼 때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학의 진정한 영향력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도구로서의 과학’에 만족하는 한, 과학자들은 역사의 참가자가 될 수 없다. 도구로서의 과학 속에서 과학자는 역사의 이방인이 될 뿐이다.

문화로서의 과학을 향해 나아갈 때에만 과학자들은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 문화로서의 과학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과학자들은 ‘지식인’이었던 자신들의 과거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지식인으로서 살기 위해 노력하게 될지도 모른다. 문화로서의 과학, 지식인으로서의 과학자의 모습을 통해, 영웅신화 속의 과학이 지닌 한계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영웅신화는 과학자를 과학이라는 상아탑 속에 가두고, 결국 그를 노예로 전락시킨다.

1. 이상하, “과학 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4). pp. 291.

2. 이상하, “과학 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4). pp. 294.

3. 이상하, “과학 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4). pp. 292.

4. 이상하, “과학 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4). pp. 299.

5. 이상하, “과학 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4). pp. 298.

6. 다음의 글이 과학자들 스스로 만든 이러한 편견을 가장 잘 드러내준다. John R.G. Turner, "The History
of Science and the Working Scientist", in “Companion to the history of modern science.” Edited by Robert C. Olby, Routledge (1989).

7. 이러한 방식의 저술들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고 다양하다. 다음의 책들을 참고할 것.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책들이 황우석 사태 이후 집중적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트레버 핀치, 이충형 역, “골렘.” 새물결 (2005); 하인리히 찬클, 김현정 역, “과학의 사기꾼.” 시아출판사 (2006); 하인리히 찬클, 박규호 역, “노벨상 스캔들.” 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김우재 UCSF 박사후연구원

저작권자 2011.02.11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