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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어죽은 불쌍한 최고은'...이게 다가 아니다

'굶어죽은 불쌍한 최고은'...이게 다가 아니다
고 최고은 감독의 죽음으로 되돌아본 영화노동자의 현실
11.02.10 12:39 ㅣ최종 업데이트 11.02.10 20:58 하성태 (woodyh)

  
최고은 감독의 영화 <격정소나타>의 한 장면.
ⓒ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최고은

 

[기사수정 : 10일 오후 2시 6분]

 

"누군가 그랬습니다. 공부가 안 돼서 우울할 땐 공부를 하면 된다고."

 

고 최고은 감독은 2006년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에서 '단편의 얼굴상'을 수상한 유작 <격정 소나타>

의 연출 의도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공부한 뒤 영화판에

뛰어든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의 창작에 대한 고민은 우울함에 그치지 않고 생활고로 번졌나

봅니다.

 

지난달 29일 "창피하지만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어서 남은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드려 주세요"라는 쪽지를 옆집에 남긴 채 32살 나이에 요절한 고 최고은 감독의 사망원인은

갑상선 기능 항진증과 췌장염 등으로 알려졌습니다.

결국 그의 죽음은 자기 영화를 위해 시나리오 작업을 전전하다 영화판 용어로 계속 작업이

엎어지며 '5타수 무안타'를 기록한 후 벌어진 일이지요.

국내외 단편영화제에 입선한 뒤 충무로에 뛰어든 젊은 창작인의 죽음은 이렇게 허망했습니다.

 

'생존', 21세기 '천 만 시대' 대한민국 영화판의 화두입니다. 아니, 역시 37세의 나이로 요절한

1인 인디밴드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 고 이진원씨와 같이, 영화판 외에도 예술 전반의 젊은

창작자들은 끊임없이 생계와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영화계만 한정한다면, 투자사와 극장만 배부르고 한 편 한 편 힘겹게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제작사들의 고충은 푸념일지 모릅니다.

스타들이나 일부 감독들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질 때, 대부분의 스태프들은 '꿈'과 '열정'을

바치며 착취를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요.

도대체 영화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요?

 

600만 동원한 흥행작도 임금체불하는 영화계 현실

 

"작년에 유명한 미남 주인공이 톱으로 나와 엄청난 흥행을 일으켰던 한 영화가 있습니다.

600만이 넘어간 영화입니다. 아마 100억은 벌었을 겁니다. 근데 그 제작사의 횡포, 아주 대단했습니다.

제 지인이 그 영화 스태프였죠.

처음에 그 제작사가 3달에 800만 원 주겠다고 하며 계약했다고 합니다.

근데 몇 주 뒤 갑자기 말을 바꾸더니 4달로 연장하자고 바꾸더래요.

한 달은 봐 줄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같은 돈에 계약했습니다.

 

근데 이게 웬 촬영은 5개월, 6개월로 늘어납니다.

처음에 3달에 800만 원 했을 땐 많게 보이죠? 근데 그 추운 겨울날 만 날 밤 꼴딱 새고 일어나자마자

새벽같이 출근하고 야근수당도 안주고 촬영은 날로 늘어갑니다.

더군다나 저 800만 원 받은 분은 기술 스태프라 그나마 많이 받은 거고요.

일반 연출부나 제작부는 저 돈의 반도 못 받을 겁니다."

 

다음 아고라에 올라 있는 '그동안 정말 말하고 싶었다. 영화 제작사의 횡포'라는 글의 일부입니다.

아이디 'Fines'는 글의 서두에 최 감독의 같은 학교 같은 과 후배라고 밝히며 "정말 눈물만 나고

그동안 참으며 쌓아왔던 이 영화 바닥의 모든 서러움과 화가 한꺼번에 터지는 순간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최고은 선배님, 아마 자신의 첫 시나리오 계약 후 엄청난 꿈에 부풀어 오르셨을 겁니다.

정말 열심히 쓰셨을 겁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돌아온 건 계약금 중 일부인 몇 백만 원 정도가

고작이었겠죠. 몇 주, 몇 달, 몇 년, 그렇게 기약 없는 시간은 흘러만 갑니다.

하지만 캐스팅과 투자가 확정되어 영화가 들어갈 때까지 받아야 할 남은 돈은 주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나가고 싶어도 자신과 자신의 시나리오는 말도 안 되는 계약 때문에 이미 회사에 묶여

있습니다. 일은 계속 하지만 돈은 받지 못합니다. 생활이 힘듭니다. 몸이 아픕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러한 상습적인 임금체불에 따른 생활고가 과연 최고은 감독, 그리고 작년에 600만을 동원한 흥행

영화의 예일 뿐일까요?

 

"1년 넘게 일해도 투자 안 되면 잔금 못 받아"

 

  
드라마 제작 현실을 그린 KBS2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2008)의 촬영 장면.
ⓒ KBS
그들이사는세상

 

'17억 2200만 원.'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영화인 신문고에 접수된 2009년 임금체불 총액입니다.

2009년에만 467명이 42건의 임금체불 피해를 입었고, 평균 건별 체불금액은 약 4100만 원, 개인별

체불금액은 약 360만 원이었습니다(☞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발표 '2010년 영화인 신문고 총결산'

바로 가기).

 

이에 비해 2010년은 7월까지 체불총액 약 6억 8천만 원, 체불 수는 18건으로 집계됐습니다.

집계가 이뤄진 2004년 이후 최고 수치를 기록했던 2009년에 비해서는 줄었지만, 근절을

기대하는 것은 요원해 보입니다.

 

더욱이 전문 시나리오 작가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9일 CBS 라디오

<변상욱의 뉴스쇼>에 출연한 <말아톤> 정윤철 감독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나리오 한 편에 처음 데뷔하는 작가는 3천만 원정도 작가료를 받는데. 문제는 이게 영화가 다

완성되어야지만 완불이 된다는 거죠. 영화제작사에서는 처음에 5백만 원이나 1천만 원정도만 주고

작업을 진행시키고. 심지어는 이것도 안 주고 그냥 진행비라는 명목으로 월 한 몇 십만 원 정도를

주면서 일을 시킵니다.

 

그런데 시나리오 개발기간은 정확히 계약서에 정해져있지 않아서 그 돈을 받고 한 6개월에서 1년,

혹은 1년 이상을 일하게 되는 거죠. 그러다가 영화가 투자가 안 되면 잔금은 못 받게 되는 그런

구조가 관행으로 이렇게 계속 되어왔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최고은 작가도 그런 식으로 몇 편 작업을 했지만, 영화가 결국 다 못 들어가면서

잔금을 다 못 받고 접은, 아주 조그마한 계약금만 받고 일하다가 결국 생활고에 이렇게…."

 

스태프들의 열악한 처우 문제는 이렇게 명약관화해 보입니다. 더불어 시나리오 작가의 경우,

임금체불도 문제지만 여기에는 분명 기획개발비의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작가들 상황 외면하고 기획개발비 삭감한 영진위

 

영화 <집행자>의 프로듀서였던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양종곤 대표는 지난해 9월 열린 '한국영화

발전을 위한 영화인 대토론회'에서 참석자 중 유일하게 기획개발비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습니다.

2011년 영화발전기금 제작지원 예산에서 전액 삭감된 약 12억 원의 기획개발비 지원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기획개발비는 영화 제작 전, 프리프로덕션 단계에 들어가는 기획·시나리오 개발 비용을 일컫습니다.

최근 영화 투자 환경이 위축되면서 제작사에서는 투자사가 이 기획개발비를 줄이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또 투자사 측에서는 제작사들이 이 비용을 방만하게 운영한다며 비용의 지출을 꺼리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가 먼저 나서 이 기획개발비에 대한

지원을 보란 듯이 삭감해 버린 꼴이 된 것입니다.

 

"이 시나리오라는 것은 영화라는 건물에 설계도를 그리는 것인데, 어떻게 보면 R&D(Research

and Development) 비용입니다. 여기에 투자하지 않고서 성공한 사업은 없고. 삼성 같은 기업도

엄청난 금액을 계속 R&D에 투자하고 있잖아요. 그런 것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으로 작가들에

대해서 정말 더 큰 투자를 해야만 합니다."

 

정윤철 감독은 이렇듯 영화계 전반의 정책과 구조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또 이명박 정부

들어 문화체육관광부(문광부) 산하 영진위가 직접지원에서 간접지원으로 정책 기조를 바꾸면서

현장 스태프들과 시나리오 작가들의 처우가 더 열악해지고 있다는 얘기지요.

 

"문광부 밑에 있는 영화진흥위원회에 MB정권에서 두 명의 위원장(강한섭, 조희문)이 왔는데, 둘 다

큰 불화만 일으키고 해놓은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국은 둘 다 사퇴를 했는데. 무엇보다

특히나 '시나리오 마켓'이라고, 시나리오 신인작가들의 등용문인 시나리오 마켓 예산을 작년에 

다 없애버렸습니다. 결국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오히려 시나리오 작가들을 더 불리하게 만든 것이죠."

 

실업부조금 제도 확립이 시급하다

 
  
.
ⓒ 조찬현
배추김치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의 대안으로 영화발전기금 신설을 제시하던 당시 문화부 장관은 기금의

목적 중 하나로 '영화 현장인력의 처우 개선 및 재교육을 통한 전문성 제고'를 들었다. 지금까지

집행된 영화발전기금의 몇 %나 이런 목적에 쓰였는지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만약 실업부조제도가

현실화 되어 고인이 수혜를 받았더라면 작금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적 타살이 아니다 명백한 타살이다."

 

8일 오후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은 최 작가의 죽음에 대해 성명서를 냈습니다.

특히나 노조 측에서 주장해 왔던 '실업부조금 제도'를 도입했다면 최 작가의 안타까운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며 정책 당국의 무능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영화산업노동조합 측은 고용보험가입자 중 180일 이상에게 지급되는 실업급여 제도에서 타업종

종사자와의 형평성을 고려해, 단기고용계약인 경우 직군을 분리하여 별도관리(12개월이내

피보험기간이 90일이상 180일 미만→실업급여 45일분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국가상공업협회의 주관 하에 영화스태프를 비롯한 문화예술노동자의 고용환경을

보장해주기 위해 실업수당의 수급요건, 수급기간을 완화(수급요건:10개월 507시간, 수급기간 243일)

함으로써 실질적인 사회안전망으로서 실업급여제도(엥떼미르땅)를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달 영진위가 발표한 '영화인 공제회 설립 및 운영 방안'에 따르면, '실업부조금제도 및

퇴직공제제도'의 필요성 조사에 대해 가장 높게 답한 직군이 바로 시나리오·연출 분야

종사자였습니다. 대부분 계약금조로 선금을 받은 후 가장 오래 제작 전반에 매달려 있어야 하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실업부조금제도와 퇴직공제제도의 도입과 운영에 대한 우호적 여론과 공감대가 일정 수준 확보된

이후, 두 가지 제도의 법적 근거 마련을 위한 입법 활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함"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영진위의 영화인 관련 복지정책이 좀 더 빨리 수립, 시행되었다면, 최 작가의 죽음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덴만의 여명>은 200억? 초현실적 영화판의 두 얼굴

 

"새벽을 여는 촬영장에서 32세의 무명작가였던 최고은씨가 생활고와 지병으로 숨졌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아픔을 어려움을 아마. 백만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다만. 그녀가 죽음의 순간까지 놓지 못했던 영화가.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어렴풋이 알수있을

것 같습니다. 부족한 재능으로 재능보다 큰 운으로 밥걱정 없이 사는 내가 참으로 초라해지는

밤입니다. 고인의 죽음이 남긴 메시지 잊지 않겠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찾을게요. 미안함과

아픔을 전합니다. 편히 쉬세요."

 

배우 엄지원씨가 자신의 트위터에 남긴 추모글입니다. 최 작가의 죽음이 알려진 어제부터 트위터

상에서는 영화인을 비롯한 예술, 창작인들의 추모글과 창작 현실에 대한 토로가 줄줄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최 감독의 죽음에 대한 추모와 함께 열악한 환경과 처우에 대한 자조와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지요.

 

반면 <괴물>에 투자를 했던 제작사 크리스마스엔터테인먼트는 8일 오후 삼호주얼리호 선원

구출작전을 논픽션으로 제작하는 영화 <아덴만의 여명>(가제)의 에 대한 보도자료를

배포했습니다.

 

"블록버스터 <아덴만의 여명>은 국내에 명망있는 감독과 최고의 스태프로 구성될 예정이며,

전 세계 배급을 목표로 제작에 들어 갈 예정"이라는 이 영화의 예상 제작비는 무려 200억

원입니다.

 

한 트위터 사용자는 "아덴만의 여명 영화화라, UDT 대원들과 석 선장만 나오면 봐주겠는데

창밖을 바라보던 가카가 고뇌에 찬 어조로 '결행하게 하지만 인명피해는 있어서는 안 되네'

읊조리는 신이 되면 스크린으로 콜라 날아갈 거 같다"라고 비아냥대기도 했지요.

 

지난해 블록버스터로 제작하겠다고 공언했던 <연평해전>이 투자금 모집을 위한 사기극으로

밝혀졌던 예에서 보듯, 영화판에선 이렇게 눈먼 돈이 횡행 합니다.

최 작가의 죽음과 같은 날 보도된 두 영화계 뉴스의 간극은 '톱스타'와 '일개 현장 스태프'의 연봉

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집니다.

 

"문화예술종사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밥 한 그릇은 복지가 아니라 권리라는 걸, 배려가 없어서 굶는

게 아니라 당연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만드는 착취 구조 때문에 굶고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문화예술종사자에게 무상급식 해 달라는 게 아니잖아."(@faddishjay)

 

한 트위터 사용자의 쓴 소리처럼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착취 구조를 이제는 끊어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정책 당국과 투자, 제작사를 비롯한 영화계 종사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실질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하고요.

그래야만 최 감독과 같은 안타까운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