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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88만원 세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중앙일보 | 기선민 | 입력 2011.02.10 00:07

[중앙일보 기선민]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적잖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달 말 경기 안양시 월세방에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32)씨가 지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다 숨진 사실이 8일 알려지면서다. 최씨는 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한 뒤 각본·연출을 겸한 단편영화 '격정소나타'로 주목 받았지만, 이후 집필한 시나리오들이 영화 제작으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생활고에 시달려왔다.

 최씨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후 트위터·인터넷 등에는 "21세기에 어떻게 아사(餓死)할 수가 있느냐""꽃이 봉우리를 피우기 전에 물이 없어서 말라 죽었다""하늘에선 쓰고 싶은 작품 마음껏 쓰고,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드시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등 애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시나리오 작가 등 영화스태프의 열악한 처우에 대해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전국영화산업노조는 8일 성명서를 내고 "고인의 죽음 뒤엔 창작자의 재능과 노력을 착취하고 이윤창출의 도구로만 쓰려는 잔인한 대중문화산업의 논리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씨에 대한 추모 열기는 지난해 말 숨진 인디뮤지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본명 이진원) 때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젊은 층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애도와 분노를 분출하고 있다. 단순히 "가엾다"는 동정 차원이 아니다.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이는 감정이입에 가깝다. "알바(아르바이트)라도 뛰어서 밥 먹지 그랬냐는 반응이 많은데 그런 사람들은 너무 어리거나 세상을 너무 쉽게 산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열심히 산 대가는 더 이상 성공이 아니라 하루 더 연명하는 것" 식의 반응이다.

 달빛요정은 뇌출혈로 쓰러져 숨진 채 지하 전셋방에서 발견됐다. 트위터 등을 통해 사망 소식이 급속히 퍼져나갔고, 인디음악인들이 불합리한 음원수익 배분 탓에 생활고를 겪어온 사연이 알려졌다. 지난달에는 홍익대 인근에선 인디밴드 101개가 집결한 추모콘서트가 열리기도 했다. 최씨와 달빛요정의 경우 취업난과 비정규직 불안에 시달리는 20, 30대와 연령상 일치한다.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건국대 교수는 소위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젊은 층이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루저 의식'을 이유로 들었다. 사회학자 엄기호씨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지적한 것처럼 무한경쟁에 내던져진 젊은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주류에 들어갈 수 없다는 패배감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하 교수는 "지난해 곽지균 감독이 생활고로 숨졌을 때 젊은 층이 보인 반응은 안타까움이었지 분노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고은씨와 달빛요정의 경우 나도 자칫 잘못하면 저렇게 될 수 있구나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존재론적인 불안감 때문에 추모 열기가 달아오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선민 기자 < murphyjoongang.co.kr >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