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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문화적 가치를 존중하라 도구로서의 과학에서 문화로서의 과학으로

과학의 문화적 가치를 존중하라 도구로서의 과학에서 문화로서의 과학으로 2011년 02월 25일(금)

과학지식인 열전 “가끔 사람들이 설문지와 녹음기를 들고 나를 찾아와서 (내가 일하는) 케임브리지대의 분자생물학연구소가 어떻게 그렇게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는지 진지한 자세로 묻곤 한다… 그들은 19세기의 파리 시 당국이 어떻게 마네, 드가,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세잔과 쇠라를 만들어내기 위해 인상파 운동을 계획했는지 조사한 적이 있을까? 나의 질문이 그리 엉뚱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창조성 또한 조직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효과적으로 운영되는 연구소에서는 과학적 창조성이 촉진되지만 위계가 분명하고 경직되고 관료적인 지배 구조와 산더미 같은 서류는 그것을 죽일 수 있다. 발견은 미리 계획될 수 없다. 그것은 퍽(세익스피어의 희곡 ‘한 여름밤의 꿈’에 등장하는 장난꾸러기 요정)처럼 예기치 못한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온다1.”

과학을 과학기술과 혼동할 때, 노벨상과 경제발전이라는 목표를 위해 과학을 추구할 때, 과학은 해당사회의 도구적 가치로 전락한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중요하다. 과학비즈니스벨트를 통해 기초과학을 증진하겠다는 정부의 의도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 속에는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 경제발전 혹은 노벨상이라는 도구적 가치 없이는 지원할 필요 없는 분야라는 철학이 전제되어 있다2.

경제발전과 노벨상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이러한 두 가지 목표를 향할 때에만 가치 있는 것인가. 그러한 도구적 가치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과학은 버려져도 아무렇지 않은 것인가.

한국사회에서 과학이 인식되는 방식

▲ 노벨상은 기초과학에 대한 장기적인 지원을 통해 얻는 부산물이다. 
노벨상은 기초과학에 대한 장기적인 지원을 통해 얻는 부산물이다. 그 어떤 국가도, 한국을 제외하고는, 노벨상을 위한 정책을 따로 수립하지 않는다. 경제발전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와 큰 상관관계를 가지지 않을지 모른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꾸준히 한다면 경제적 가치가 큰 연구가 발표될 가능성이 높아질지 모른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생명보험과 같다. 우리는 언제 죽는지 알기 때문에 생명보험에 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보험에 가입한다. 박정희 정권에서 수립된 이러한 과학기술정책의 철학은 여전히 한국사회를 무겁게 짓누르는 짐이다. 이러한 정책적 틀 속에서는 정부의 관료들도, 과학기술자들도, 대중도 모두 잠재적 피해자가 된다.

20세기 후반의 저개발국들의 과학과 기술의 상호관계를 정량적으로 연구한 드로리(Drori S)의 연구는, 적어도 저개발국에서는 위계 모델보다 선형 모델이 더욱 잘 들어맞는다고 말한다3. 즉, 과학자들도 과학기술정책관료들도 대중도 기초과학에 대한 무조건적인 투자가 경제성장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4.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대중과 관료들이 기초과학에 대한 무분별한 단기투자에 기대하는 바가 클 수록, 그리고 그 기대가 철저히 경제적인 가치에 관여되어 있을 수록,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과학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로 경제적 효용가치가 창출되는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연구결과가 보여주듯, 과학과 기술에 대한 투자는 맥락의존적이기 때문에, 선진국의 사례들 뿐 아니라 우리의 과학기술정책이 겪어온 역사를 철저히 분석했을 때 그나마 제대로 된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5.

특히, 과학자 사회는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경제성장과는 무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해야만 한다. 그것이 오히려 경제성장이라는 지나친 압박 속에서 자유롭고 창의적인 연구를 할 수 없는 한국의 과학자들에게 도움이 된다. 지금 잘못되어 있는 것은 기초과학에 대한 그 어떤 역사적 분석과 철학도 없이 짜여진 과학정책 시스템이지, 과학자들의 연구방식이 아니다. 이러한 정책을 바꾸기 위해서는 과학자들도 지금까지 잘못 인식되어온 과학에 대한 이해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노벨상을 갖고 싶다면, 그래서 국격을 조금이라도 올려보고 싶다면, 과학기술관료들도 경제성장이라는 욕심은 잠시 접어둘 필요가 있다. 경제성장을 위한 과학기술정책과, 노벨상을 위한 과학기술정책은 철학과 방향에서도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근대과학을 보유하고 있었던 선진국의 사례와 우리의 사례가 같지 않다. 한국은 기초과학에 대한 큰 투자 없이 경제성장을 이룩한 국가 중 하나다. 과학정책만을 놓고 본다면, 박정희의 철학을 탓할 수 있겠지만, 경제성장을 위한 기술정책의 측면에서 박정희를 바라본다면, 그의 선택이 반드시 틀렸던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박정희의 프레임 속에서 과학기술을 사유하고 있다는 비극적 현실이다6.

▲ 한국에서의 과학기술은 경제발전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김영식은 한국 과학기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과학기술이 순전히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만, 즉 경제적인 효용과 이익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추구되는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과학기술관이라고 말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파로부터 식민지 시대와 박정희 시대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은 이러한 방식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 결과 과학기술은 한국 문화 전반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다.

한국인들에게 과학기술은 어쩐지 문화적이지 못하며, 심지어는 지성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비춰진다. 특히 일반 지식인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무지를 당연히 여기며, 아예 무관심한 것은 한국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렇게 도구로만 인식된 과학기술관은 서양 과학기술을 모방하고 이용하는 데 주력하는 풍토를 조성했으며, 박정희 시대 이후 지금까지도 한국 과학기술계가 현대 과학기술에 창의적으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과로 나타났다. 특히, 이러한 공리주의적 과학기술관은 과학기술자들이 지나치게 정부에 의존하도록 만들었고, 그것이 더더욱 그들 자신의 독자적인 과학기술문화를 만드는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과학기술은 옹호되고 진흥되고 지원되고 이용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도구로서일 뿐이며 독자적인 문화적 영역으로서가 아닌”것이다7.

과학의 문화적 가치와 예술의 문화적 가치

한국사회에서 과학은 문화적 가치로 인식되지 않았다. 과학의 태생적이고도 본래적인 가치였던 이러한 문화적 속성이 제거된 한국사회의 과학은 성숙하기도 전에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아 경제발전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고, 이제는 노벨상이라는 국격을 위한 도구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의 정당화를 목적으로 단순하게 경제적 논리를 끌어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것은 검증되지 않은 신념이기 때문이며, 한국의 역사 속에서도 철저히 이율배반적인 논리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기초과학에 대한 막대한 투자 없이도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 왔다. 삼성이 아이폰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기초과학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먹고 사는데 기초과학은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는 예술이 그러한 것과 같다.

▲ 김우재 UCSF 박사후연구원 
예술처럼 이미 사회 속에서 문화적 가치를 배제한 채로는 논의조차 될 수 없는 영역에서도 ‘문화산업’과 같은 경제적 가치가 도입되고 있다. 이는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자본주의의 확장과 함께 벌어진 사건이다. 예술과 과학은 모두 문화적 가치를 향유한다는 점에서 경제적 가치와 일정한 대립각을 세우는 분야다8. 하지만 예술의 문화적 가치와는 다르게, 과학의 문화적 가치는 한국사회에서는 진지하게 인식되지 않고 있다.

특히 과학과 문화의 관계를 다루는 이들의 의식 속에서, 문화로서의 과학과 문화의 관계는 예술을 다룰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유치한 틀 속에서 사유되고 있다. 만약 예술의 문화적 가치를 ‘호기심 천국’과 같은 수준에서만 다루어도 예술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 것이라면, 과학도 그렇게 해도 상관 없다. 하지만 예술은 ‘예술의 전당’과 같은 장소에서야 행해질 수 있는 고귀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과학은 ‘호기심 천국’처럼 유치하게 다루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인식한다는 것은 희극적이다.

과학문화, 대중의 과학이해, 과학과 인문학, 통섭, 융합학문과 같은 개념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그 어떤 논의도 과학의 역사 속에서 발견되는 문화적 가치에 주목하지 않았다. 과학의 문화적 가치란 과학을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고 유치하게 변형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1. 막스 페루츠, 민병준, 장세헌 역, “과학자는 인류의 친구인가 적인가?” 솔 (2003). 12쪽.

2. '비즈니스벨트'라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 노벨상 수상을 위한 억지정책이라는 것도 여러 정책가들의 인터뷰나 발언으로부터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3. Drori, G. S. “The Relationship between Science, Technology and the Economy in Lesser Developed Countries.” Social Studies of Science 23, no. 1 (February 1993): 201-215.

4. 특히 이러한 여러 계층의 기대는 한국사회에서 '원천기술'이라는 해괴한 신조어로 집약되고 있다. 경제적 가치에 대한 기대가 과학에 대한 기대와 묘하게 중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특허와 같은 제도를 통해 경제적 부를 창출하는 기술분야가 아니라 과학에 관련된 것이라면, 원천기술이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과학자사회의 기본적인 규칙 중 하나는, 모든 연구결과와 과정은 동료들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유명한 과학저널들의 편집정책만 훑어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6. 노벨상 수상 시즌만 되면 여전히 한국사회는 같은 화두를 반복한다. 이러한 지긋지긋한 반복은 오래된 것이다. 예를 들어, 화학자 김용준은 1990년대에 이미 현장의 과학자로서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해왔다. "그러나 문제는 과학과 기술의 풍토는 마치 올림픽 선수촌에서 훈련시키는 발상만 가지고는 향상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첨단기술이 내일의 첨단기술이라는 보장도 없다. 과학기술 풍토는 올림픽 금메달 식으로 조성되지는 않는다. 매스콤에 아랑곳 없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후미진 대학 연구실에서 내일의 첨단기술은 잉태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김용준,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유감.” 한국논단 7 (1990).

7. 노명우, “문화와 경제의 불협화음: 문화산업에 대한 재해석.” 게임산업저널 12 (2005).

8. 김영식, 김근배 엮음, “근현대 한국사회의 과학,” 창작과 비평사, (1998).

김우재 UCSF 박사후연구원

저작권자 2011.02.25 ⓒ ScienceTimes